조선일보 방응모의 친일매국 행각 2

기사입력 2021.10.29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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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조선일보는 중국 침략 한 돌을 맞은 193877일 사설, 머릿기사 등 전 지면에서 <“열철일타의 일본혼이 총후국민의 위력과 같이 동아의 신질서 건설의 발단을 만든 국민 감격의 기념일인 77일을 맞이하여 전 조선의 도시 농산 어촌에 들끓는 총후 황국신민의……물적 심적 총동원의 체제는 귀한 호국의 영령에 바치는 조의와 출정 장병의 신고를 생각게 하는 뜻깊은 여러 가지 행사”>라고 보도하여 일제의 중국대륙 침략전쟁을 적극 미화하는 보도를 하였다

 

이것은 조선의 젊은이를 일제의 침략 전쟁 수행을 위한 총알받이로 내몰기 위한 조치인 지원병제도를 찬양 홍보한 것이다. 1938114일 석간에서 <동아 신질서의 건설... 제국 불퇴전의 태도성명>이란 사설을 통해 일제의 중국침략을 미화하고 조선민중의 적극 동참을 요구하고, 중일전쟁 발발의 책임을 중국정부에 돌렸다. 그러면서 일제의 침략 전쟁 수행을 뒷받침하기 위해 조선 민중의 내핍 생활을 요구하기도 했다.

 

일제찬양과 아부에 매진한 1930년대

 

193911일 석간 1면에서 <천황폐하(天皇陛下)의 어위덕(御威德)>이란 제목과 함께 국화 문양이 곁들인 일왕 부처의 사진을 게재하였다. 1939211일에도 초대 신무왕(神武王)이 즉위한 날이라 하여 일본 건국일로 기념하는 소위 기원절(紀元節)’이라 하여 조선일보는 사설 <기원절(紀元節)>을 게재, 일 왕실을 찬양하였다.

 

211일에도 소위 기원절(紀元節)’(일본의 건국기념일) 축하식을 가졌고 77일에는 소위 지나사변 2주년 기념식을 오전 930분 조선일보사 대강당에서 전 종업원이 모인 가운데 1) 국가합창(일본국가 기미가요 합창), 2) 동방요배(일왕이 사는 곳을 향한 궁성요배), 3) 전사 장병묵도, 4) 황국신민서사 낭독, 5) 식사, 6) 천황폐하 만세삼창 등의 순으로 거행하였다.

 

1939429일 사설, <봉축천장절(奉祝天長節)>에서 ……춘풍이 태탕하고 만화가 방창한 이 시절에 다시 한 번 천장가절(天長佳節)을 맞이함은 억조신서(億兆臣庶)가 경축에 불감(不堪)할 바이다. 성상 폐하께옵서는 옥체가 유강하시다니 실로 성황성공(誠惶誠恐) 동경동하(同慶同賀)할 바이다. 라고 일왕을 적극 찬양하고 협력하는 보도를 하였다.


조선일보 사진 기사.jpg

 

 

<194011일 조간 1 조선일보 사진기사>

 

194011일 조간 1면에서 <천황폐하(天皇陛下)의 어위덕(御威德)>이란 제목과 함께 일왕 부처의 사진을 싣고, 제호 위에 일장기를 게재하였다.

 

1940211일 조간 1면에서는 <봉축(奉祝) 황기이천육백년(皇紀二千六百年) 기원절(紀元節)>이란 사설을 게재하였다. 이 기사에서도 양춘이 내복하고 만상이 활발하여 서기가 팔방에 충만한 이날에 황기 이천육백년의 기원절을 마지하는 것은 야마토(大和)민족 전체의 감격과 녹행이 무상한 바이다”,라고 운운하며 역시 일본 왕실을 찬양하고, 일제의 침략전쟁 수행에 조선민중이 적극 협력해야 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조선일보는 폐간 4개월 전인 1940430일에도 일왕의 생일을 맞아 황공하옵게도 천황 폐하께옵서는 이날에 제39회 어탄신을 맞이하옵시사……신자(臣子)의 충심으로 흥아성업도 황위하에라고 하면서 지금껏 사용해 왔던 신민 대신에 신자(臣子)’라고 일왕의 자식으로 표현하여 아부가 극에 치달았다.

 

조선일보의 위와 같은 보도는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최정점이자 상징인 일본 왕과 황실을 찬양, 미화하고 일제의 시책에 적극 협력하는 것으로써 일제강점기 독립을 염원하는 민족정신을 좌절로 몰았고, 조선을 영원한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 나지 못할 것으로 보도하여 친일 반민족 언론행위를 한 것이다.

 

충성과 아부행위에도 자진폐간한 조선일보

 

방응모는 총독부의 언론통제가 강화되고 신문 통폐합 정책이 대두되자 19403조광발행인으로 취임하고 8월에 조선일보를 폐간하였다. 폐간사 내용에, “조선일보는 신문통제의 국책과 총독부 당국의 통제방침에 순응하여 금일로써 폐간한다 지나사변(중일전쟁) 발발 이래 본보는 보도보국의 사명과 임무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였고 더욱이 동아 신질서 건설의 위업을 성취하는 데 만의 일이라도 협력하고자 숙야분려한 것은 사회일반이 주지하는 사실이다.” 라고 적고 있다.여기서 폐간사 내용 중에 순응하여 폐간한다.’라고 적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총독부 정책에 순수히 따른 것으로 짐작된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조선일보에 대해 새로운 충신이 나타나서자신과 경쟁한다면서 총독부는 비슷한신문이 셋이나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며, (중략) 충성을 다하는 신문들이니 일본은 기자들을 재취업시키는 수고까지 떠맡았고, 신문사에는 보상금을 주었다고 한다. 전투기 한 대가 10만원이던 때 100만원이니, 거액의 보상금이다라고 보도하였다. 조선일보는 일제 충성을 다하는 신문이니 폐간에 따른 기자들의 재취업과 보상을 해 주었는 기사다. 총독부 기관지조차 조선일보가 친일 신문이라 것을 인정한 것이다.

 

잡지 조광을 통한 방응모의 친일매국행위

 

방응모는 일찍이 193510월에 잡지 조광을 창간했다. 나중에 방응모는 조선일보를 폐간한 후부터는 잡지 조광을 통해서 직간접으로 친일 아부 행위를 이어간다. 조광을 본격적으로 친일잡지로 개편하고 그 자신이 직접 친일논설을 기고하는 등 친일행각을 이어갔다.

 

특히 조광』「창간5주년사에서 國民로서는 누구나 最後覺悟를 하지 않으면 안될 때를 하였습니다. 안으로는 新體制確立, 밖으로는 革新外交政策强行하여 하루바삐 東亞新秩序建設完成시켜서 世界新秩序建設하고 한걸음 나아가서 世界永久平和企圖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또한 조광은 조선어 잡지임에도 불구하고 일문기사를 게재하는 등 일제의 열렬한 시국선전 잡지로 이끌어 갔다. 1941년에는 친일잡지 삼천리의 사장인 김동환의 발기로 전시보국단체인 임전대책 협의회가 결성되었는데, 방응모는 이 단체의 위원으로 참여하여 종로 화신백화점 앞에서 전비조달을 위한 채권가두유역대(종로대: 방응모, 윤치호, 한상룡, 최린, 이광수 외 다수. 황금정대: 박흥식, 고원훈 외. 남대문대, 본정대, 명치정대, 경성역대, 서대문대, 종로4정목대, 동대문대, 청량리대, 연락본 등에 다수가 참여)를 편성해서 경성 11개 장소에서 채권판매운동을 전개해서 전쟁경비를 조달할 목적으로 일제가 내놓았던 1원짜리 꼬마 채권을 거리에서 판매했다.

 

194110월에 들어 친일단체의 총집결장인 조선임전보국단으로 해체·통합되었다. 조선임전보국단은 조선인이 전쟁협력을 위해 임전대책협의회와 흥아보국단을 통합시켜 결성한 전시체제기의 최대 민간단체로 방응모는 발기인과 이사로 참여했다. 방응모는 점점 친일논조가 강해지면서 19422월 호 조광대동아전과 우리의 결의특집에서 타도 동양의 원구자(怨仇者)라는 본격적으로 영미(英美)를 규탄하는 논설을 썼다. 이 글은 태평양전쟁 개전 직후에 소식을 들은 뒤 쓴 감상문이었다.

 

방응모는 영국과 미국을 동양의 원구자요, 전체의 죄인으로 규정하고 동양을 침략하고 유린하고 또 임의로 착취하여 동양인을 멸시 천대한 데서 찾았다. 따라서 이번 대동아전쟁은 그들에게서 동양을 이탈하여 공영권을 건설하고 세계의 평화를 도모하려는 것은 물론이지만 일편으로 보면 참아오던 원한 폭발이라고도 할 것이다"라며 일본은 평화의 사명국가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방응모는 19422월 특집에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군관당국을 절대로 신뢰하여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 것을 주장하고 아울러 일하지 않는 사람은 국민이 아니라는 관념을 깊게 가지고 국민개로(國民皆勞)운동에 동참하고 물자절약에 솔선하며, 전비확충의 바탕이 되는 저축강화 등을 촉구하고 있다. 어떻든 반도민중은 이때에 물력(物力)과 심혈을 총 경주하여 국책에 협력할 것을 다짐하자는 것이었다. -2부-

[김영대 기자 motokim0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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