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응모의 최후
1950년 6월 25일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방응모는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고 한다. 1950년 9월 28일, 북한 개성의 서흥군 송악산 부근에서 트럭에 실려 끌려가던 도중, 갑자기 미군기4대가 날아들어 조명탄을 터트리고 폭탄과 기총을 퍼부어 방응모는 이 공습으로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시신은 서흥군 인민위원회에 맡겨져 장례가 치러졌고, 서흥 부근에 매장된 것으로 알려졌다.
마무리
한국신문의 근대적 발아점을 되돌아 볼 때, 제국일본의 식민지하에서 발간된 조선어 민간 3지 중, 2개지가 현존하여 한국언론사에 있어서 중요한 역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민간 3지의 하나였던 『조선일보』가 재벌 언론사로 급성장한 것은 일제지배하에서 철저한 친일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오늘날까지 신문재벌 방씨 일가로 연결되어 있기에 단순히 방응모라는 개인차원을 넘어 한국언론사 연구에서는 『조선일보』와 방응모를 나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방응모의 친일행각은 직접적으로 각종 친일 관변단체에 참여해 현지 강연과 각종 매체를 통해 일제통치와 군국주의를 찬양했고, 조선일보 기사를 통해서는 식민지 통치 찬양, 황실 숭배, 침략전쟁 미화 등의 아부성 기사를 통해 친일매국행위를 하였다.
또한, 『조선일보』의 자매지 『조광』을 통해 방응모는 친일논설을 직접 써서 일제의 전쟁 도발을 찬양하거나, 일제의 침략전쟁에 전조선인이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시국인식과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활동을 했던 점을 조광에 실린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방응모가 어떤 인물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별도의 인물연구가 필요하겠지만, 그는 일제하에서 적극적인 친일활동과 일제 식민지 통치권력의 유착을 통해 『조선일보』를 반민족 언론기업으로 육성시킨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방응모는 조선일보와 조광을 통해서 ‘친일 매국행위’를 일삼고 조선민중의 ‘민족독립 의지’를 좌절시키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에서 반민족 언론 기업인이었다는 점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 3부 -
박인식(언론사학자, 언론소비자주권행동 정책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