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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 1838~1922)
주범 미우라 고로를 조선주재 일본 공사로 추천한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일본야마구치(山口)현 출생.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일본의 대표적인 정치가이자 군인으로 쇼우카손죽쿠(松下村塾)에서 학습. 1889년에 야마구치(山口)현 육군 군인으로서 처음 내각 총리대신으로 취임. 1894년 청일전쟁에서는 56세에도 불구하고 제1군사령관으로서 스스로 전지에서 작전을 지휘. 1898년에 제2차 이토 히로부미 내각 발족. 원로(元老), 육군대장, 원사(元帥).
미우라는 외교 수완이 없는 군인출신으로서 국가주의자이기도 했다. 조국이 원한다면 과격한 무력도 불사하는 인물, 동향동문으로서 누구보다도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 이노우에는 미우라 공사 추천은 제국일본의 대륙침략과 지배를 위한 장애물인 조선의 왕비를 제거하라는 암시였다. 더군다나 미우라를 공사임명한 후에도 수상 이토 히로부미나 외무성에서는 정부의 훈령도 전달하지 않고 급히 조선공사로 보낸 것도 그런 이유였다.
미우라 공사를 포함 시해 주범들 증거불충분 전원석방
미우라 수기인 『관수장군종횡담(觀樹將軍縦横談)』과 『관수장군회고록』에 의하면, 10월17일에 왕비 살해의 주범인 미우라 공사는 해임•소환되어 다음날 18일에 미우라, 아다치 겐조(安達謙蔵: 한성신보 사장)를 포함한 약50명의 재류 일본인의 퇴거 명령이 내려졌다. 미우라를 포함하는 관련자들은 히로시마 지방법원에 기소되었다.
1896년1월 20일, 미우라는 히로시마에서 수감되어서 재판을 받았지만, 군법회의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또한 히로시마 지방재판의 예심에서도 요시오카(吉岡美秀) 판사는 전원 면소로 석방시켰다. 출옥하는 날 미우라는 “그 주변의 유지들의 환영회에 초청되었다. 그곳부터 기차로 돌아갔지만 연도에 이르는 곳에 많은 사람들이 군집해서 만세! 만세!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일이 있었다라고 회고록에 기록되어 있다.
박인식 박사는 일본 정부는 국제 범죄자들을 적극 보호아래 감옥에서도 뿐만 아니라 관민으로부터도 영웅처럼 대우를 받았고 미우라가 석방되어 도쿄에 도착했을 때 일왕은 그의 노고를 치하하기도 했다고 설명하였다.
일본정부는 을미사건 직후, 미우라 외 현장 살해범들을 서둘러 일본으로 소환하고 형식적인 재판을 통하여 사건을 조속히 마무리 졌다. 이것은 수상 이토 히로부미를 포함한 미우라를 감싸는 야마구치(山口)현 출신의 최고 군부 권력자와 내각 수권자들에 의해 조직적이고 치밀한 계획하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일본정부는 전대미문의 사건 중대성에 비해 단 기간 가볍게 처리할 수 밖에 없었다고 박인식 박사는 설명하고 있다.
왕궁을 습격해 왕비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운 천인공노할 국제범죄.
조선에서 일본세력을 배제하려는 왕비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전임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의 치밀한 계획과 주도하에 신임 미우라 고로 공사와 스기무라(杉村濬) 서기관은 일본내각과 군부 최고 권력자의 후원을 받고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지금까지도 명성황후의 시해에 대한 여러가지 설이 난무하는 것도 당시 일본정부가 국제적 책임과 고립을 피하기 위해 시해사건 당시 일본의 철저한 축소 은폐공작을 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당시는 확실한 규명도 여의치 않았다. 특히 사건자체를 혼란에 빠트리고 미스테리화하려 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역사적 진실이 봉인된 것도 적지 않다.
일본내각 최고위급의 미우라 공사 임명
일본정부는 청국과 조선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일본이 조선반도의 지배권을 얻으려고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청•일전쟁으로 일본은 대사파견을 통해서 정체되었던 조일 국교조정을 서둘렀고 청국을 대신해 우위에 선 조선관계를 계획하고 있었다.
일본은 줄곧 조선의 내정개혁을 진전시키기 위해서 수상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조선공사를 소환하고 내상이었던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특명전권공사로 임명한다.
[김영대 기자 motokim08@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