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3・1운동 100주년 특집 4

기사입력 2019.07.13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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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외무성 자금으로 설립된  『한성신보』社 
엘리트 일본인 기자들의 관언 유착과 현장시해

 
명성황후 시해를 현장에서 지휘한 사람 중, 1892년 10월에 부산에 온 구마모토 국권당의 아다치 겐죠(安達謙蔵: 1864~1948)다. 아다치는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조선공사로서 착임했을 때, 이노우에와 면담하는 자리에서 조선인을 계몽하기 위해서 조선언문에 의한 신문을 발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노우에 공사는 그의 말에 공감하고, 일등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에게 신문발행에 대해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1894년12월1일, 이노우에 공사는 전문으로 무츠 무네미츠(陸奥宗光) 외무대신에게 조선에 있어서의 신문발행 비용을 요청으로, 1895년 2월 17일, 아다치 겐조(安達謙蔵)와 사사 마사유키(佐々正之)가 외무성 ‘기밀비 1,200엔으로 조선어와 일본어로 주한일본공사의 기관지 『한성신보』를 창간하게 된다.

그리고 나서 일본 외무성은 1895년 3월부터 『한성신보』에 매월 130엔, 7월부터는 170엔의 보조금을 증액해 지급했고, 명성황후 시해 다음해 7월부터는 300엔으로 대폭 증액해 보조금을 주었다. 이는 외무성과 한성신보사의 관언유착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아다치 겐조.jpg

<아다치 겐조(安達謙蔵) 『한성신보』사장>

 

왕비 시해자 피고 총수48 , 구마모토현 사람 21, 이중 히로다(広田正善), 나카무라(中村楯雄), 다나카(田中賢道)의 민권운동 3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아다치 겐조 포함 대부분 기자출신의 구마모토 국권당 관계자였다. (『왕성사건관계1건』 「예심종결결정서」 참조)

 

을미사변은 외무성의 기밀비를 통해서 창간된 한성신보사장 아다치 겐조(安達謙蔵)나 주필 구니도모 시게아키(国友重章), 편집장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 사사 마사유키(正之) 이하 사원 전원, 그리고 부산어학교 출신 스즈키 준미(鈴木順見), 국민신문의 기쿠치 겐조(菊池謙譲) 특파원, 일본신문의 야마다 츠요시(山田烈聖) 특파원, 호치신문의 요시다 유우요시(吉田友吉) 통신원이 가담하고, 미우라의 진두 지휘하에서 조선의 국모를 살해하는 국제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일본내각이 치밀하게 주도한 민관 합동 전대미문의 사건 


미우라가 당시 외상대리로 있던 사이온지(西園寺) 앞으로 보냈던 사건 보고 전보(야마모토 시로: 山本四郎 三浦梧楼 関係文書明治史料研究連絡会, 1960, 89)에 따르면 왕궁에서 무차별 궁녀들을 살해할 때 마침 그곳에 있던 외국인에게 영어로 왕비가 어디 있냐? 라고 외치는 증언 장면도 볼 수 있고, 명성황후 시해 현장에는 낭인이라기 보다는 당시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정도라면 당시 최고의 지식인들에 의해서 왕비시해가 행해진 것이다.

 

명성황후의 시해를 현장에서 진두 지휘했던 한성순보사의 아다치는 1896120일 히로시마(広島) 재판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 난 후, 1905710일에 일본 외무성의 기밀비 1,700엔 받아 평양신보를 창간했다.

 

그 후 아다치는 그 명성황후시해 성공의 공로로 일본정부의 보호와 지원을 받고 승승장구하여 체신대신(1925~1927), 내무대신(1929~1931), 국민동맹 총재(1932~1940)를 역임하고 194883세로 사망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직후의 외국 언론보도

 

경성특파원인 콜로넬 코커릴(Colonel Cockerill)은 사건 1주일 후인 10월15일에 파리 발행의 『The New York Herald』의 「헤럴드가 뉴스를 제공했다」라는 제목에서 「조선의 대신과 대담을 한다」라는 부제를 붙이고 조선의 왕비가 살해된 것을 크게 보도하고, 이를 구미사회에 알렸다.

10월 16일자의 『The New York Weekly Tribune』은 “조선 왕비의 살해자가 확인되었다. 왕(고종)은 죄수, 위대한 독재자인 왕의 아버지는 친일정부에 이끌려 취임했다고 10월 13일자의 파리의 신문으로부터 인용해 보도했다. 그리고, 왕비는 일본 군대가 성문을 지키고 있었을 때, 살해되었다. 일본 대신이 그 살해 음모를 알고 있었다라는 내용은 눈에 띄지 않았다. 왕은 지금 죄수로 반대파 리더인 아버지 대원군은 신 내각을 친일세력으로 구성할 것이다. 왕비의 측근은 도망했다. 장사라는 일본인이 왕비의 살해범으로서 체포되었다” 라고 비교적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다. 이 기사 이전에는 왕비 살해사건을 보도한 자료가 없는 것으로 보아 미국에서 최초 왕비살해 뉴스를 보도한 신문으로 추측할 수 있겠다.

동 신문 10월 30일자에는 「조선의 왕비의 사체가 발견되었다」라는 제목으로10월16일 요코하마(横浜)발 기사를 인용해 “왕의 아버지(대원군)와 그의 추종자에 의해, 최근 공격을 받고 죽은 왕비의 사체가 발견되었다. (일본정부는) 고무라(주타로) 조선 공사에게 만일 일본인들이 왕비를 살해한 것이 증명되면 살해범을 처벌하라 명령했다”라고 보도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요미우리신문』(読売新聞)이나 요코하마의 『마이니치신문』(毎日新聞) 등이 사건 다음날부터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외국언론이 인용하거나 관련자에게서 소식을 제공받았을 것이다. 단지, 이들 신문도 처음에는 일본의 관여를 부정하고 정부의 견해를 전하기만 한 것으로 보여 일본내 신문기사 인용이 대부분이었다.

도쿄대학 법학부 메이지신문잡지관(明治新聞雜誌館)에 보관되어 있는 『마이니치신문』(毎日新聞) 10월 9, 10, 11일 자 기사에서 국왕은 무사하지만 왕비는 행방불명되었다는 내용과 일설에는 몰래 궁궐밖으로 피신했을 것이다. 라고 보도하고 있었다.
미우라는 이전부터 불교에 몰두하고, 출가 입도의 길을 걷고 있었던 인물로서는 1895년 9월 1일 조선공사로 착임한다. 문관이 아닌 육군중장 출신의 군인을 외교관으로 보냈다는 사실은 특수한 임무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미우라는 조선에 온 뒤부터 두문분출하고 불경을 외우면서 시해를 계획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왕비를 시해한 후에도 엄청난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살생의 죄의식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을 뿐 만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를 영웅으로서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는 당시 『요미우리신문』(読売新聞) 기사도 있었다.

미우라는 육군중장 출신으로서 국가를 위한 절대적 충성하는 마음을 가지고 국가를 위해서라는 이유가 강하게 지배한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 사료에서 미우라는 국가주의에 관철하는 군인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고, 야마가타와의 강한 유대감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헤아릴 수 있다.  

명성황후 시해를 계획하고 사건 후 처리를 담당한 것은 이노우에 가오루였다. 미우라 고로를 공사로 강력하게 추천한 사람도 이노우에(井上)였다. 하지만 공사 부임을 거절하는 미우라(三浦)를 최종 결심하도록 군부 최고 권력자인 야마카타 아리토모(山県有朋)의 국가주의적 설득이 유효했으며, 이를 최종 승인한 사람은 수상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로 오로지 국가주의자들의 한가지 목표 만을 위해 의기투합을 한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일본내각과 군부 최고 권력자들에 의해 저질러 진 천인공노한 국제적 만행인 것이다.
                                                                            (제공 : KCJ 국제관계연구 소장 박인식 박사)

 

 

 

 

 

 

 

 

 

[김영대 기자 motokim0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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